보수주의, 하나님 인정하는 성경적 기독교 세계관 : 정치 : 기독일보


16세기 초에 김감불(金甘佛)과 김검동(金儉同)이 연은분리법(鉛銀分離法)을 개발하자 은의 함유량이 풍부한 단천 연광(鉛鑛)이 채굴되기 시작하여, 전국 여러 곳의 은광이 개발되었다. 조선 건국 후 15세기 전반까지는 한양천도에 따른 토목공사와 무기제조에 많은 철물이 필요하였다. 중앙의 선공감과 군기감에서 필요한 철은 각 고을의 경작지 면적에 따라 철물을 부과하여 걷었다.


이러한 점이 조선 왕들이 현대인들보다 단명했던 주요 원인의 하나라고 생각한다. 조선 시대 왕들의 수명이 현대인과 비교하여 현격한 차이가 있었던 이유로서는 의학의 한계, 비위생적인 생활습관, 영양의 과다섭취에 비해 적은 운동량, 과로 등이 왕의 수명을 재촉했을 것이다. 조선의 왕들은 잘못된 생활습관 하에서 감염증과 성인병 같은 질병이 자주 발생하였으며 이러한 질병을 미리 예방할 수 있는 보건 개념이 미흡했던 것이다. 조선이 관료제 사회였다는 말은 양반 출신 관료들이 주도하여 운영하는 사회였음을 뜻한다. 양반 관료가 행사하는 권력은 관료인 까닭에 왕권에 의해 뒷받침되는 부분과 양반의 소유 토지 등의 경제력, 성리학 이념, 법률에 보장된 특권 등으로 구성되는 부분이 결합되어 내용이 복잡하였다. 당초에 과전법에 이어 직전법, 직전세로 이어지면서 수조권적 토지지배가 존속하는 동안에는 고려시대만은 못하였지만 고위 관료들이 이를 바탕으로 상당한 경제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


마름모꼴 꽃모양(능화菱花) 창 안에 여의주를 쫓는 용 한 마리를 백색 상감으로 표현했다. 청자의 푸른빛이 하늘이 된 것처럼, 흰색 용이 몸을 틀며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다. 능화형 창을 경계로 바깥쪽에는 봉황과 넝쿨을, 안쪽에는 용과 구름을 가득 장식하여 초현실적인 세계를 엿보는 듯하다. 향로 뚜껑 위에 용이 올라앉아 여의주를 움켜쥐고 머리를 치켜올린 채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음각선으로 장식된 비늘과 주름, 갈기 장식 사이로 푸른색 유약이 채워져 정교하면서도 입체적인 모습이 강조되었다. 용의 몸통을 관통해 입에서 피어 올라오는 향을 상상해보게 된다.


신료들이 폭군 연산군을 왕위에서 쫓아내고 그 이복동생 이역(李懌)을 왕위에 앉힌 사건인 중종반정 이후 왕권은 한 단계 약해졌고, 시기에 따라 기복이 있었으나 끝내 그 이전의 수준을 회복하지 못하였다. 토지와 노동력에 대한 국가의 공적 지배가 위축되고 양반 사족의 사적 지배가 확대되는 상황에서 직전을 폐지한 데 이어 녹봉주24 지급액도 줄여가야 하였다. 이러한 조건에서는 국왕이 정치를 주도하기 어려웠고, 의정부와 대신들도 지도력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 공신들은 일반 관직자와 달리 공신이라는 지위와 공신전의 수조권으로 강력한 특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왕실 구성원 및 왕실과 혈연관계가 있는 주요 가문의 구성원들도 국왕의 초월적 지위에 의지하여 특권을 행사하는 일이 많았다. 이제 관원이 과거처럼 특권을 누리려면 공신이 되거나 왕실과 관계를 맺어야 하였다.


이어서 항조(抗租), 항세(抗稅) 운동으로 진전되는데, 개별적 운동에서 집단적 운동으로 발전하였다. 19세기 농민항쟁이 전개되면서 그 과정에서 민중의 조직이 발전하고, 민중의식도 아울러 성장하였다. 그 원인을 제공한 것은 삼정문란으로 표현되는 부세제도 운영에서의 모순이었다. 수령과 향리, 향임 세력의 수탈 심화, 세도정권의 국정운영에 따른 문제 등이 겹치면서 국가와 농민 사이의 대립, 지주와 전호 사이의 대립이 전개되었다. 15세기 후반 이후 도적, 수적에 대한 기록이 많아져, 경제력 회복 이후 토지소유의 집중 현상이 재연되기 시작하면서 나타나기 시작하였음을 보여준다.


현직 관료의 문과 응시는 대과는 당하관 이하, 소과는 5품관 이하만 응시할 수 있고, 수령의 소과 응시는 금지되었다. 양반 가문이 증가함에 따라 관료 진출에 과거가 중시된 반면, 가문을 보아 등용하던 음서의 비중은 줄어들었다. 따라서, 양반 자제는 출세하려면 과거를 치러야 하였고, 과거를 치르기 위한 필수 조건으로 유교적 교양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여러 교육기관에서 수기(修己)주153와 치인(治人)주154의 학문을 열심히 닦았다. 이는 양반이란 곧 관료로 출세하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는 계층을 뜻하였다.


이전의 선학(先學)들은 경원도호부가 함경북도 경원군을 가리키고 그곳이 두만강변에 있으므로 이를 확장해 공험진의 위치가 ‘두만강 북쪽 700리 밖’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어쨌든 이렇게 세종대왕이 고려의 북쪽 국경인 공험진, 선춘령 등의 위치를 모르고 있었다는 점으로 볼 때 과연 동북 9성이 함흥평야나 함경북도 길주 이남에 있었다면 이런 일이 가능할지 의문이다. 우리는 여태껏 고려가 멸망할 때 당시의 국경이 압록강~함경북도 길주군으로 배워왔다.


공법에 따른 20분의 1세의 상상년급 20두는 1결당 생산량을 400두로 보고 산정한 것이다. 또, 1결의 면적도 종전의 3등전에 비해 축소되었으므로 실지로는 하중년급 6두나 하하년급 4두의 적용이 많았고, 임진왜란 이후에는 4두로 고정되고 말았다. 과전법 당시의 3등전과 공법의 6등전을 평수로 환산하면, 다음과 같다. 그리고 연분구등법은 상상년부터 하하년까지 9등년으로 나누어 20두에서 4두까지로 정하였다.


이어서 17세기 말에는 도적 집단의 활동이 다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장길산의 무리가 가장 유명하며, 지방 장시의 발달이 군도(群盜) 활동에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양안을 분석한 연구에서 조선 후기의 토지소유 상태를 살펴보면 약 10% 내외의 부농이 전체 농지의 43%를 점유하고 있었다. 농업이 발달하면서 광작하는 부농과 농촌을 버리고 떠나는 이농민으로 농민이 분화하였다.


판소리의 창자들은 창을 엮어냄에 있어서 새로운 이야기를 창작하기보다는 전래하여 오던 설화를 근간으로 하여 그것을 다채롭게 윤색하고 개작하였다. 이렇게 해서 일단 성립한 작품들은 창자들의 사승 및 교류에 따라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승되면서 다시 부분적으로 개작되고 확장되어 매우 다양한 내용과 음악적 표현을 축적하게 되었다. 열두마당 중에서 현재까지 창으로 전해지는 「 춘향가」, 「 흥보가」, 「 심청가」, 「 수궁가」, 「 적벽가」를 전승 5가라 한다. 판소리는 소리꾼주204이라고 하는 가수가 북재비주205라는 고수의 북 장단에 맞추어 부르는 민속 가요의 한 형식이다. 판소리는 처음에 전라도를 중심으로 한 남도 지방에서 발생하여,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판소리 명창들이 남도 지방에서 배출되었고, 오늘날 판소리를 ‘남도창’이라고 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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